이순신의 역사

반응형

이순신의 역사

 

비열한 리더십의 전형, 선조

 

선조, 명군의 자질을 갖추다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에서 가장 무능한 왕으로 역사학자들은 선조와 인조 그리고 순조를 꼽는다. 41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치한 선조에게 7년간의 임진왜란은 군주인 그에게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시간이었다. 선조가 처음부터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왕은 아니었다. 즉위 초만 하더라도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노심초사 고민하고 공부했으며,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국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달라지게 되었다.

 

16세의 나이에 조선의 14대 임금이 된 선조는 원래 명군의 자질이 있다고 평가되었다. 그중 가장 큰 요인은 학문적 소양을 갖췄기 때문이다. 선조는 당대에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들을 많이 등용한다. 이이, 류성룡, 이산해, 이항복과 이덕형, 정철, 성혼, 이원익, 노수신, 박순, 기대승, 윤두수 등 뛰어난 인재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등용한 것은 선조의 업적 중에 가장 큰 업적으로 보고 싶다.

 

또한 선조가 이순신을 핍박만 했던 건 아니었다. 장군이 부친상을 당한 후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 3년 탈상을 하자마자 장군을 종4품 만호로 크게 승진 발탁했고,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2월에는 당시 정읍현감(종6품)이었던 장군을 전라좌수사(정3품)로 임명했다. 특히 전라좌수사 임명에 대해서는 신하들이 지나친 파격 승진이라며 반대했지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왜란 직전에 장군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던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지 않았다면, 전쟁 초기부터 장군이 호남 곡창 지대를 사수하고 왜군의 북진을 저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선조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붕당정치가 시작되다

선조는 즉위 초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선조는 어린 나이였지만 국정의 주도권을 쥔 훈구파와 새롭게 정계로 진출하려는 사림파 양쪽 세력을 잘 견주며 노련하게 국정을 운영했다. 선조는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좌의정 심통원을 사림파를 이용해 제거하고 점차 사림파를 중용한다. 조정을 장악한 사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붕당을 형성했고 선조는 붕당을 이용해 양 세력을 견주며 왕권강화를 도모했다. 이 붕당의 시초가 우리가 잘 아는 동인과 서인이다. 선조 이전에도 신하들 간의 정치적 대립은 항상 있어 왔지만 선조 때부터 붕당이 본격화됐고 치열하게 싸웠다. 붕당정치는 장점도 있지만, 때로는 수많은 인재를 죽음으로 몰고 간 비극을 만들기도 했다.

 

백성을 버린 왕

선조는 유학을 장려하고 좋은 인재를 알아볼 줄도 알았지만, 7년 전쟁에서 드러난 그의 리더십은 낙제점이었다.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일행의 보고는 상반됐다. 서인 출신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말하고, 동인 출신의 부사 김성일은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한다. 조선 조정은 전쟁을 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아마도 선조와 조정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하기가 싫었겠지만, 이는 조선을 비극으로 이끈 뼈아픈 결정이었다. 전쟁의 가능성이 단 1%라도 보였다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실히 대비했어야 했다. 하지만 선조와 조정은 국제 정세에 어두워 일본이 대군을 파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선조의 나태한 결정으로 조선의 백성은 너무나 아픈 7년을 보내야 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로 상륙한 왜군은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한다. 선조는 조선 왕으로는 최초로 파천했다. 한양을 떠나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조정을 옮겼다. 평양에 있을 때 공빈 김 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분조(조정을 둘로 나누는 일)를 명해 함경도로 보냈다. 왜군의 계속된 북진으로 의주에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던 선조는 명나라로 건너가 살겠다는 요동내부책을 거론한다. 왕이 백성을 버리고 피난 간 것도 모자라 명나라로 망명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참으로 비겁하고 치욕적인 우리의 역사이며 선조의 모습이었다.

 

명나라의 참전 후 평양성을 탈환하고 다시 한양을 수복한 후에도 선조는 성난 민심을 바라보지 않았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을 부역으로 고단하게 하고, 군수용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재산을 빼앗는 등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이에 백성들은 관청을 습격하고 식량을 나누는 등 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선조는 잔혹하게 민란을 진압하고 관련자를 처했다. 선조는 서른 살의 의병장 김덕령을 민란의 주동자로 잡아들였다. 김덕령은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붙잡혀서 20여 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장독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은 목숨을 내놓고 싸우던 많은 의병장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의병장 곽재우는 자신도 선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워 의병대를 해산하고 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많은 의병장이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나라에 모든 것을 바친 의병장들에게 보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국왕 선조가 얼마나 졸렬한 리더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힘을 합쳐 싸워도 모자랄 상황에 영웅들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선조의 리더십은 국난을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동안 군주로서 자신이 가졌던 신념과 철학을 완전히 상실했다. 왕으로서의 책임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지키기에 급급했고, 끊임없는 의심과 견제로 신하들을 통제했다.

 

공신 책록으로 자신의 과오를 덮다

7년간의 전쟁은 조선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백성들의 삶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선조는 국가재정을 위해 납속책(돈을 받고 신분을 격상시켜 주는 제도) 등을 실시해 재정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전쟁의 상처를 복구하는 데 집중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1604년 선조는 전후 공신을 책봉하는 논공행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신의 선정은 선조의 계산된 술책이었으며 선조가 얼마나 옹졸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행위가 된다.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공신들은 선무공신, 호성공신, 선무원종공신으로 구분됐다. 선무공신은 전란 때 큰 공을 세운 장수들로 총 18명이었는데, 이중 1등 공신은 이순신, 원균, 권율로 두 명(이순신, 원균)은 이미 전사한 상황이었다. 2등, 3등 공신 중에서도 사망자가 더 포함돼 있다. 공을 세운 장수 중 생존자들이 많이 제외됐고 의병장들은 여기에 포함되지 못했다. 선조는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한 원균을 이순신과 같은 1등 공신으로 책봉하며 상대적으로 이순신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반면에 피난 가는 왕을 호위해 따라간 신하들을 호성공신에 다수 봉했다. 86명에 이르는 호성공신에는 마구간지기와 내시 그리고 왕의 심부름꾼도 포함돼 있다. 목숨 걸고 전장에서 싸운 선무공신이 단 18명에 그친 것에 비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이다. 무관보다는 문신 중심이고, 전쟁터보다는 왕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더 공로가 있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또한 선조는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공을 명나라에게 돌렸다. 조선의 의병이나 이순신을 비롯한 장수들에 공을 돌리지 않고 명나라의 원군 때문에 국난을 극복했다고 해야, 본인이 백성을 버리고 파천한 일이나 명나라로 망명하겠다고 한 자신의 과오를 조금이라도 감출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